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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80대 '어른이 오면 재깍 비켜줘야지' 60대 '나도 경로우대자'

관리자 0 2,384 2015.05.21 00:00
[뉴스 속으로] 고령화 시대 ‘노인 간 갈등’
지하철 노약자석 자리 신경전 늘어
관련 민원 3년 새 두 배 가까이 증가
임신부·장애인도 눈치 보느라 곤욕

지난달 6일 오후 3시쯤 박모(66) 할아버지는 1호선 회기역에서 인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고 노약자석(교통약자석)은 텅 비어 있었다. 박 할아버지는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박 할아버지는 큰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눈을 떠 보니 맞은편에 서 있는 한 할아버지가 박 할아버지를 흘겨보고 있었다. 자신을 80대라고 소개한 할아버지는 '머리도 검은데 자리 양보도 안 한다'며 '어른들이 오면 재깍재깍 일어나 자리를 비켜줘야지 모른 척 졸고 있느냐'고 타박했다. 박 할아버지는 '나도 경로우대증을 받을 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왜 눈치를 봐가며 노약자석에 앉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노년층 사이에서 지하철 노약자석을 두고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노인들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 세대를 꾸짖는 일이 잦았다면, 이제는 노(老)-노(老) 갈등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최근 각종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도 '지하철에서 노인 두 명이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싸움 시작' '청담역에서 노약자 좌석에 70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가는데 80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나이도 어린 것이…’라며 화를 내셔서 싸움을 말렸네요' 등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서울메트로(1~4호선)와 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에 따르면 노약자석 관련 민원은 2011년 117건에서 2014년 219건으로 배 가까이 증가했다. 눈에 띄는 건 연령대별 민원 건수다. 같은 기간 동안 65세 이상 노인이 다른 노인을 상대로 낸 민원 건수는 집계된 것만 16건에서 38건으로 늘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접수자의 나이가 확인되는 경우만 집계한 수치'라며 '실제 지하철 안에서 노년층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리다툼 건수는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노약자석을 함께 사용하는 임신부나 장애인들도 곤욕이다. 다음달 출산을 앞둔 신유선(32)씨는 '어르신들끼리 자리를 두고 눈치 싸움을 하거나 60대가 70대에게, 70대가 80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분위기에서 임신했다고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기 어렵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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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지난해 기준 642만9000여 명을 기록했다. 전체 인구 대비 노인 인구 비율은 약 12.7%였다. 2011년 통계청의 장래 인구 추계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노인 인구 비율은 2020년 15.7%, 2030년 24.3%, 2060년 40.1% 등으로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고령인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서울시의 ‘최근 5년간 서울지하철 1~8호선 시니어패스(우대권) 이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우대권을 이용한 지하철 수송 인원은 2010년 1억5386만 명에서 지난해 1억893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 상당수는 65세 이상 고령인구다. 무임 승차 손실액도 같은 기간 2228억원에서 288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눈치가 보이는 건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만난 박문배(76) 할아버지는 '자리를 양보해주는 젊은이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미안해서 웬만하면 노약자석에 앉으려고 한다'며 '하지만 동묘역이나 종로3가역 등 노인들이 많이 타는 역을 지날 때면 노약자석에 앉아도 다른 노인들 눈치가 보여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주명룡(70) 대한은퇴자협회장은 '하루 평균 1300여 명이 65세를 맞을 정도로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며 '이에 비해 사회적 준비가 부족해 갈등이 생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고령인구 증가율에 맞춰 지하철 노약자석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메트로는 1985년 10월 처음 노약자석 제도를 도입해 지하철 각 칸마다 양 끝에 12석씩 설치했다. 95년 ‘노약자·장애인지정석’, 2004년 ‘노약자·장애인·임신부보호석’ 등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좌석 수는 그대로다.

 2009년 일반 좌석 중 7석을 ‘교통약자 배려석’이란 명칭으로 추가 지정하면서 노약자를 위한 자리는 한 칸당 19석이 됐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다. 추가된 7석 중 2석은 임신부를 위한 지정석인 데다 일반인에겐 추가석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정선혜(26)씨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은 종종 보지만 평소 비어 있는 것은 거의 못 봤다'며 '노인이나 임신부가 보이면 자리를 양보하지만 그 외엔 그냥 앉아서 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등은 고령인구 증가세에 맞춰 노약자석을 더 확충해야 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하루 평균 노인·장애인 등이 이용하는 우대권 승객 비율은 13.3% 수준으로 전체 좌석 중 노약자석과 교통약자 배려석의 비율보다 높은 상황'이라며 '교통약자 배려석을 더 홍보하고 인식을 제고시킨 뒤 우대권 이용률 등을 고려해 노약자석 확대 여부를 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일부 국가와 같이 노약자석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일반 좌석에 군데군데 배치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영국 등 일부 국가는 안내 스티커만 붙이고 좌석을 분리하지 않고 노약자석을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만큼 인구구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산업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의 인구구조를 분석한 결과 한국 인구의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70년의 고령인구 비중을 1로 설정했을 때 우리나라의 고령인구 비중은 4.0으로, OECD 평균 1.6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전통적인 장수 국가 일본(3.6%)보다도 높은 수치다. 김미혜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지하철 노약자석 문제의 경우 한국의 급속적인 고령화 문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며 '이 외에도 노인층을 포함한 사회 통합을 위해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회 갈등은 갈수록 깊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령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노인’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노인 기준 연령인 65세는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수명이 50세 중반밖에 되지 않았던 50년대에 인구학자들에 의해 정해졌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3월부터 9개월 동안 65세 이상 1만452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2014 노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인의 78.3%가 노인의 연령 기준을 ‘70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75세 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1.6%로 2011년보다 7%포인트 증가했다. 박화옥 강남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육체적·정신적으로 노인 스스로가 인지하는 기준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며 '기준 연령을 70세나 75세로 높이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S BOX] 작년 노인진료비 19조 넘어

김소임(61) 할머니는 건강보험료가 오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속이 쓰리다. 김 할머니는 '병원에 가보니 대부분 여유 있어서 치료 받으러 오는 노인들이었다'며 '돈 쓰느니 앓는 게 나은 나 같은 노인들은 병원도 못 갈 텐데 건강보험료는 계속 오르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 건강보험료 증가가 노(老)-노(老) 갈등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인 진료비 부담 증가로 건강보험재정이 악화되면서 건강보험료가 2010년 4.9%, 2011년 5.9% 등 2013년까지 평균 3.8% 인상됐기 때문이다. 노인 빈곤율이 48.6%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이 낮은 노인에게 건강보험료 인상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4년 노인 진료비 증가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진료비는 19조3551억원으로 전년 대비 10.4% 증가했다. 노인 인구 비율이 10%대인 데 비해 노인 인구 진료비 점유율은 35.5%에 달해 재정 지출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향후 노인 인구로 편입될 경우 노인 진료비 규모는 더욱 빨리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는 '노인 진료비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75세 이상 연령대에 진입할 경우 건강보험재정 위협 정도도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폭증하는 노인 의료비를 소화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영준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진료 방법 등에 있어 환자의 질병 종류와 소득수준에 맞는 맞춤형 배분이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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